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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국에서 발생하는 사회, 경제, 정치, 과학, 한민족등등 관련 뉴스를 한글로 빠르게 접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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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1)—참군열조와 전선지원
영원한 기념비(21)—참군열조와 전선지원 2011.10.18|[길림신문]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주로 군사투쟁에서 체현되였다. 산해관으로부터 금주, 사평, 장춘에 이르기까지 동북민주련은 병력이 부족했기때문에 거듭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우세한 국민당군은 사평, 장춘을 점령함으로써 송화강기슭에까지 공격해왔다. 하지만

영원한 기념비(28)—확고한 동만근거지
영원한 기념비(28)—확고한 동만근거지 2011.10.18|[길림신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시작했다. 산에 들에 두텁게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였고 양지바른 언덕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여올랐다. 1947년 봄, 엄동설한을 이겨낸 동북민주련군은 동북대지에 줄기줄기 뻗은 장백산맥과 굽이굽이 뻗은 송화강을 사이두고 우세한 국민당군

영원한 기념비(27)—사간방전투
영원한 기념비(27)—사간방전투 2011.10.18|[길림신문]

민주련군주력이 덕혜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자 두률명은 부하 장교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이른바 《덕혜승리》라는 거짓 소식을 조작해내고 덕혜전투에서 민주련군 10만을 소멸했다고 떠들었다. 오래동안 승전소식을 듣지 못했던 장개석은 이 소식을 접하자 크게 기뻐

전통음식 중국전역에 보급하는 조선족녀인
전통음식 중국전역에 보급하는 조선족녀인 2011.10.13|[길림신문]

특별기획-중국조선족기업인(21) -중국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회장 김순옥을 찾아서 김순옥(金顺玉)프로필1980년 7월-1984년 9월 연변대학 법률학부 법학사 1984년 7월-1986년 9월 상해 화동정법대학원 헌법학 전공 1984년 7월-2003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조계

영원한 기념비(26)—폭파영웅 조성두
영원한 기념비(26)—폭파영웅 조성두 2011.10.12|[길림신문]

동북민주련군이 다시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하자 안도의 숨을 쉰 동북 국민당군총사령인 두률명은 1947년 1월 30일에 4개 사단의 병력을 모아 두번째로 림강을 공격했다. 국민당 52군 195사는 자기의 전투력과 현대화한 무기를 믿고 단독으로 근거지에 깊숙이 들어왔다.

영원한 기념비(25)—화수림자전투
영원한 기념비(25)—화수림자전투 2011.10.12|[길림신문]

해방전쟁시기 동북의 국민당군과 동북민주련군은 천연장벽인 장백산의 로야령산맥과 송화호를 사이두고 대치하고있었다. 동북민주련군은 송화강동부에 포진하고 로야령산맥에 의지해 국민당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며 수시로 강을 건너 송화강서부 국민당군의

영원한 기념비(24)—림강보위전
영원한 기념비(24)—림강보위전 2011.10.11|[길림신문]

1946년말부터 1947년초까지 남만의 상황은 극히 어려웠다. 국민당군이 화전, 반석, 매하구, 통화를 차지하고 반월형으로 림강을 중심으로 한 근거지를 포위했다. 수만 군인과 난민이 림강에 몰려왔기때문에 근거지의 물질적조건은 극도로 결핍했다. 게다가 군민들은 겨

영원한 기념비(23)—림강으로
영원한 기념비(23)—림강으로 2011.10.11|[길림신문]

흑룡강성 할빈시 서남부로 30킬로메터 떨어진 곳에는 85만 인구를 가진 소도시 쌍성시가 있다. 송눈평원에 위치한 쌍성시는 예로부터 흑룡강성의 남대문으로 불리워왔다. 해방전쟁시기 동북민주련군은 교통이 비교적 발달한 쌍성시에 전선지휘부를 설치하였고 동북민주

라림하강반에 활짝 핀《민족의 꽃》
라림하강반에 활짝 핀《민족의 꽃》 2011.10.10|[길림신문]

- 민족향발전 본보기 연화조선족향을 찾아 (2)유수시 연화조선족향 리장수서기 장춘지구 유일한 조선족향인 유수시 연화조선족향, 3개 행정촌에 9개 생산소조, 2714명 인구를 갖고있는 작은 조선족향이 편벽한 지리위치 등으로 기타 지역보다 뒤떨어져있던것이 2009년

불멸의 발자취(50)—김원봉과 남경의 사적지들
불멸의 발자취(50)—김원봉과 남경의 사적지들 2011.10.09|[길림신문]

1930년대 남경은 중국 관내 조선인 혁명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김구와 한국림시정부가 남경에 와서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을뿐만아니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도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을 이룩해내고 각파 혁명

백색가전 글로벌 챔프 하이얼 한국 틈새시장서 성장가도
백색가전 글로벌 챔프 하이얼 한국 틈새시장서 성장가도 2011.10.07|[흑룡강신문]

하이얼 코리아 김병렬 대표 인터뷰 (흑룡강신문=칭다오) 하이얼이 한국에 진출한 지도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이얼은 시장 진입에 있어 진입기, 정착기, 선도기의 3단계를 밟게 되는데, 현재 하이얼 코리아는 두 번째 단계인 정착기에 접어들고 있다. 김병렬 하

자식들에게 《부친상》을 /오기활
자식들에게 《부친상》을 /오기활 2011.10.07|[중국조선족문화통신]

오기활 미국인구중 유태인의 비례가 3%지만 미국 유명대학교수의 30%가 유태인이고 미국 억만장자의 40%가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세계인구의 0.25%지만 노벨수상자의 33%가 유태인이다. 유태인의 이런 우수성은 《책의 민족》으로 불리는 유태민족이 어릴 때부터 가정에

영원한 기념비(17)—화전군정대학과 길동군정대학
영원한 기념비(17)—화전군정대학과 길동군정대학 2011.10.05|[길림신문]

1946년 국민당군이 장춘과 길림시를 점령하자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길림성 군구와 정부기관, 군정학교가 모두 연길로 옮겨졌고 연길은 동만해방구의 정치,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은 동북에서 우리군의 가

영원한 기념비(16)—북만 토비숙청
영원한 기념비(16)—북만 토비숙청 2011.10.05|[길림신문]

1946년 6월 26일에 장개석은 중경평화담판의 합의서를 찢어버리고 화북에 집결한 수십만명의 국민당군을 동원해 해방구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반파쑈전쟁이 승리한후 중국에서의 평화적인 노력은 모두 무산되여버렸고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근 1년간의 시간

영원한 기념비(15)—적과의 대치
영원한 기념비(15)—적과의 대치 2011.10.04|[길림신문]

1946년 5월 18일, 사평에서 철수한 민주련군은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20만 병력을 송화강이북으로 철수시켰다. 5월 22일에 동북국은 장춘으로부터 할빈에 철수하고 국민당군은 23일 장춘을 다시 점령하였다. 28일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길료성

영원한 기념비(14)—전략적 후퇴
영원한 기념비(14)—전략적 후퇴 2011.10.04|[길림신문]

피어린 장춘 쟁탈전이 끝났다. 전반 전투에서 조선족 열혈청년들로 구성된 조선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없이 싸우면서 장춘을 점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일반 전사로부터 퇀장, 부퇀장에 이르기까지 280여명 우리 민족의 훌륭한

영원한 기념비(13)—장춘쟁탈전 하편
영원한 기념비(13)—장춘쟁탈전 하편 2011.10.03|[길림신문]

1946년 봄,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무력투쟁과 담판의 형식으로 진행되고있었다.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10여만 주력군이 심양으로부터 본계, 사평으로 공격태세를 취했고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손에 장악한 팔로군, 신사군 주력부대를 사평부근

영원한 기념비(12)—장춘쟁탈전 상편
영원한 기념비(12)—장춘쟁탈전 상편 2011.10.03|[길림신문]

1946년 2월에 쏘련군의 철수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였다. 이때는 장개석도 대량의 정예군을 동북에 진입시켰기때문에 쏘련군의 철수를 더 지연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정부의 촉구도 심해졌다. 미영정부는 쏘련은 주둔기한을 연장한 기회를 빌어 밤낮을 가

불멸의 발자취(49)—김구와 림시정부 요원 피난처
불멸의 발자취(49)—김구와 림시정부 요원 피난처 2011.09.30|[길림신문]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강점하였다. 부유한 동북대지는 일제가 더욱 큰 야망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지로 전락되였고 수천만 동북사람들이 일제의 압박과 략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수억 중국인민의 강렬한 반항을 불

영원한 기념비(11)—북만과 남만에서
영원한 기념비(11)—북만과 남만에서 2011.09.29|[길림신문]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에는 토비가 많았다. 이가운데서도 흑룡강성의 토비가 특히 살벌했다. 리화당(李华堂), 사문동(谢文东), 마희산을 두목으로 하는 크고작은 비적떼는 한때 북만 3분의 2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비적들은 공산당 간부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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